'슈퍼콘서트 20 폴 매카트니/전문가 칼럼' (14건)


폴 매카트니는 녹음된 음악 분야의 공인 역사적 영웅이지만 공연으로도 월드 슈퍼스타로 군림하고 있다. 횟수, 관객동원, 공연의 퀄리티 그리고 일반과 미디어의 화제 등 모든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것은 비틀즈라는 불멸의 전설을 주도한 것은 물론, 비틀즈 해산 후 개인적으로도 불후의 업적을 창조하면서 20년 이상의 전성기를 누린 결과로 볼 수 있다. 빌보드가 내린 폴 매카트니 히트평점을 보면 1960년대는 압도적 1위, 자신의 이끈 밴드 윙스와 함께 한 1970년대는 1위 엘튼 존에 몇 점 차이 나지 않는 2위였다. 이러니 그를 넘어설 자 없다.



공연 실황 앨범과 곡이 차트 정상 등극 

 

폴 매카트니의 공연 중 우선 돋보이는 것은 가장 많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1975-76년 <윙스 오버 더 월드투어>였다. 영국 브리스톨을 시작으로 호주, 미국, 유럽을 관통한 이 투어는 비틀즈 시절에 못지않은 폴 매카트니의 막강한 스탠스를 만천하에 알렸으며 무대 구성과 진행 등 모든 점에서 이후 공연의 모델이 됐다. 

이를테면 ‘Silly love songs’와 ‘Live and let die’ 등 윙스 즉 비틀즈 이후의 히트곡들을 중심으로 하되 비틀즈에 대한 관객의 향수를 의식해 중간에 ‘Yesterday’나 ‘Blackbird’와 같은 비틀즈의 골든 레퍼토리를 끼워 넣는 방식이다. 관객들은 추억과 감동에 젖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폴 매카트니 공연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단골 장면이다. 1975-76 월드투어 중 미국 시애틀 공연은 영상으로 담아 나중 1980년 <록 쇼>라는 이름(공연 타이틀이기도 했다)의 영화로 공개되기도 했다. 



출처: 폴 매카트니 공식 유튜브

 

 

열화와 같은 공연 열기는 히트차트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이 월드투어의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과 메사추세츠 보스턴 가든의 공연은 세 장짜리 라이브 앨범 [윙스 오버 아메리카]로 발표되어 ‘당연하게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자리를 밟았다. 1979년 영국 순회공연 중 글래스고에서 녹음된 라이브 버전 ‘Coming up’은 빌보드 1위에 등극, 비틀즈 이후에만 그때까지 넘버원 송을 7곡이나 기록했다. (그는 비틀즈 이후 총 9곡에다 비틀즈 때 20곡으로 모두 29곡이라는 전무후무의 차트 넘버원 송 기록을 세웠다.) 



리오 콘서트, 18만 명 관객으로 기네스 기록 

 

콘서트에서 그가 광채를 발하는 이유는 언제나 관객들에게 최대를 선사하려는 열정적 ‘풀 서비스’ 그리고 겸손한 자세 때문인데 이런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고희가 넘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폴 매카트니 공연을 보는 것은 그래서 세계인들의 평생 숙원이다. 1990년 월드 투어의 일환으로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로 마라카냥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공연은 그것을 입증해 무려 18만 명의 관객이 운집, 기네스북 레코드를 수립했다. 





이 월드투어는 윙스와 작별하고 폴 매카트니 개인(물론 밴드 형식이긴 했지만) 이름을 달고 펼쳐진 첫 메이지 투어로 역시 실황 앨범 [트리핑 더 라이브 판타스틱]이 발표되었다. 판타스틱이란 단어가 말해주듯 그의 공연 ‘매직’은 윙스와 함께 하든, 혼자 하든 변함이 없었다. 

1991년에도 실황 투어 앨범 [언플러그드]는 곧이어 하나의 트렌드가 된 언플러그드 공연 실황이다. 에릭 클랩튼, 로드 스튜어트 등에 봇물을 이룬 언플러그드 열풍에 앞서, 이를테면 MTV 언플러그드가 생기기 전에 발매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빌보드에서도 14위에 올랐다. 언플러그드 공연의 원조도 폴 매카트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공연은 또 TV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1993년에는 한해 전부를 할애하고 지구촌 전 지역을 커버한 더 뉴 월드 투어가 펼쳐졌는데 이 가운데 미국 노스 캐럴라이나 소재의 블록버스터 파빌론(지금은 베리즌 와이어리스 앰피씨어터 샬롯으로 이름이 바뀜)에서의 공연은 실시간으로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어 화제를 모았다. 

 


더욱 공연에 박차를 가한 2000년대

 

나이 환갑을 넘긴 세월도 폴 매카트니의 공연 열정을 누르지 못했다. 세계 각지에서 밀려들어오는 콘서트 요청을 가능한 한 수용하게 되면서 공연에 관한 한 그는 뉴 밀레니엄에 다시 리즈 시절을 맞았다. 2003년에는 3월부터 6월까지 유럽 14개국에 걸친 순회공연에 돌입했다. 비틀즈 시절 ‘Back in the USSR’을 부른 그는 이 가운데 5월24일에는 러시아의 유서 깊은 붉은 광장에서 라이브를 가졌다.  

 


출처: Paul McCartney Music 유튜브

 

 

자본주의 국가의 음악이었기에 비틀즈의 음악은 구소련에서 공식 금지되었지만 소련 국민들은 암시장을 통해 꾸준히 비틀즈 음악을 경청해왔다. [폴 매카트니 인 레드 스퀘어]란 타이틀의 DVD로 발매된 이 라이브는 그 객석이 보여주는 함성의 도가니만으로도 비틀즈와 폴 매카트니가 이념과 정치성을 초월한 예술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앞서 5월11일에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적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한 판타스틱 콘서트를 가졌다. 이 무대는 화려한 조명이 압권이었으며 무려 50만 명의 관객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2004년에 3,000회 공연 기록


이 무렵 폴 매카트니는 공연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영국 BBC 방송은 2004년 6월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3,000회 공연을 맞았다고 보도했다. 당시까지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비틀스의 일원으로서 2,523회, 밴드 윙스와 140회 그리고 이후 솔로 아티스트로서 285회 무대에 섰다고 한다. 그는 공연 횟수로도 사상 최고의 존재다.  

2009년에는 유럽에서 여덟 차례 거행한 <굿 이브닝 투어>를 가졌다. 미국에서는 뉴욕의 야구팀 뉴욕 메츠의 새로운 홈구장 ‘시티 필드’에서 가졌고 이 실황은 그해 11월 DVD와 앨범이 <굿 이브닝 뉴욕 시티>로 발매되었다. 앨범은 빌보드 16위에 올라 그의 존재감을 재확인했다. 이 공연은 18만장의 티켓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여기서 부른 비틀즈 시절의 곡 ‘Helter skelter’는 그래미상에서 ‘베스트 솔로 록 보컬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했다.



출처: Paul McCartney 공식 유튜브

 

 

폴 매카트니는 2010-11년에는 서른여덟 차례 무대를 돈 <업 앤 커밍 투어>를, 2011-12년에도 역시 서른여덟 번 무대에서 선 <온 더 런 투어>를 가졌고 2013년부터 지금까지 이미 80군데 이상을 소화한 <아웃 데어 투어>를 진행 중이다. 1942년생, 올해 나이 73세의 고령을 전제하면 지금 그의 콘서트는 하나하나가 신기록인 셈이다.




 

 Writer.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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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or Hate? 그래도 사랑이야



 

폴 매카트니 VS 존 레논. 비틀즈의 팬들에겐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와도 맞먹는 질문이겠지만 솔직해지자. 비틀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도 둘이요, 비틀즈의 찬란한 업적을 두고 비중을 견주게 되는 이름도 둘이다. 따로 또 같이, 치열한 애증의 세월을 보냈던 폴과 존.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본다. 





리버풀 출신의 파릇파릇한 청년 넷이 모여 ‘비틀즈’라는 밴드로 신화가 되기까지. 10년이 채 안 되는 짧다면 짧을 비틀즈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가장 결정적이었던 순간은 존 레논이 폴 매카트니에게 밴드 합류를 제의했던 바로 그 날일 게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존은 리버풀에 있는 쿼리뱅크 고등학교에 다녔고 ‘쿼리맨’이란 스쿨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1957년 7월 6일, 어느 교회에서 공연을 하던 존은 운명처럼 폴을 만나게 된다. 둘에게는 음악 외에도 가슴 아픈 공통점이 있었다. 존은 17살 때 교통사고로 인해, 폴은 14살 때 유방암으로 인해 각기 어머니를 잃었는데 이러한 동병상련이 둘의 사이를 더욱 깊고 끈끈하게 만들었다.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던 존과는 달리 폴은 코드를 알았고 모든 악기를 직접 튜닝할 줄 알았다. 조지 해리슨을 존에게 소개한 것도 폴이었으니 폴이 아니었더라면 비틀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비틀즈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비틀즈 초기만해도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은 ‘환상의 복식조’처럼 완벽한 시너지를 뿜어 냈다. 두 사람이 작곡한 곡은 사이좋게 ‘매카트니-레논(McCartney-Lennon)’, 혹은 ‘레논-매카트니(Lennon–McCartney)’라는 표기를 썼다. 학교도 빠져가며 함께 만든 첫 싱글 ‘Love me do’를 시작으로 비틀즈, 더 정확히 말하면 폴과 존은 전 세계를 강타하는 빅히트 넘버들을 줄줄이 뽑아낸다. 특히 비틀즈의 대표곡으로 기록된 노래 중 다수는 폴이 작곡한 것으로 깐깐한 존조차도 폴의 탁월한 작곡 능력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Yesterday / 어느 날 아침, 폴 매카트니는 잠에서 깨자마자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꿈 속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멜로디. 어디서 들었던 곡인지 아니면 무의식 중에 카피한 곡인지 확실치 않았지만 친구들의 검증 끝에 이 곡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나온 완전히 새로운 곡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폴은 자는 동안에 저절로 ‘Yesterday’를 작곡했다.





Hey Jude /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로맨스는 사실상 불륜으로부터 시작됐다. 아내 신시아 파웰과 아들 줄리앙을 등한시했던 존을 대신해 그들을 다독였던 것은 다름 아닌 폴. 상처 입은 줄리앙을 위해 휴가를 함께 보내기도 했던 폴은 여느 때처럼 줄리앙을 만나러 가는 길, 달리는 차 안에서 “Hey Jude, don't make it bad”란 가사로 시작하는 위로곡을 만들었다. 





Let it be / 비틀즈 멤버 간의 불화가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폴 매카트니는 꿈 속에서 어릴 적 하늘나라로 떠난 어머니를 마주했다. ‘Let it be’는 꿈 속 어머니가 남긴 말로 이 곡은 폴과 그의 아내였던 린다 매카트니가 즐겨 듣던 노래다. 안타깝게도 린다 매카트니는 폴의 어머니와 같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린다의 장례식에서는 그녀가 생전에 좋아했던 ‘Let it be’가 쓸쓸히 울려 퍼졌다.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갈등과 견해 차이, 오노 요코의 개입으로 더욱 악화된 관계, 비틀즈의 매니저이자 그들이 의지했던 친구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등 연이은 악재로 인해 비틀즈는 결국 해산된다. 멤버들 모두 그리 아름답지 못한 이별을 경험했지만 그 중에서도 폴과 존의 사이는 점점 최악으로 치달아 서로를 끔찍이 증오하는 지경에 이른다. 폴과 존의 불화는 전 세계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 늘 화제였다. 폴이 양의 귀를 잡고 있는 사진을 앨범 재킷에 실으면 존은 자신의 앨범에 돼지의 귀를 잡고 있는 사진을 실었다. 공개적으로 양과 돼지에 상대를 빗대 노골적인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하지만 ‘Love’와 ‘Hate’의 감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쌍의 톱니바퀴와도 같은 것. 미우나 고우나 그들은 인생의 황금기를 공유했던 동료이자 친구였다. 존 레논이 광팬이 쏜 총에 맞아 비극적으로 요절하기 전, 다행히도 폴과 존은 화해의 무드를 조성하며 관계 회복의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비록 자주는 아니지만 안부를 주고받았으며, 가끔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고, 존이 사망한 후에는 서로에 대한 진심 어린 찬사를 세상에 토로했다. 오노 요코에 의하면 존은 폴 매카트니를 “오노 요코와 더불어 내 인생 최고의 파트너”라 고백했다고 한다. 폴 역시 “그래도 나에겐 존 레논이 최고였다, 죽어서도 그를 만날 것”이라며 그를 위한 헌정송을 만들기도 했다.



 

 

음악과 문화, 사회적으로 혁명에 가까운 반향을 일으켰던 로큰롤의 전설 비틀즈. 지구상 가장 성공한 밴드로 기록되었던 비틀즈의 전설을 잇는 것은 20세기 대중음악의 살아 있는 신화 폴 매카트니뿐이다. 그의 눈부신 경력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작곡가이자 뛰어난 베이시스트, 보컬, 기타리스트, 피아니스트, 드러머, 음악 교육가, 화가, 사회운동가, 채식주의자, 심지어 기사 작위까지 획득한 우리의 폴 매카트니 경. 이제 그를 사랑으로 영접할 날도 머지않았다. 

 

 


 

글. 이은정

감수 및 그림. 남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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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2015.03.24 17:42

    비밀댓글입니다

  2. addr | edit/del | reply 2016.01.18 19:22 신고

    그림이건 글이건 폴위주로 써놨네. 전무ㄴ가가 아니라 초기본적인걸음마 의견인듯‥

 

“도살장 벽이 유리로 돼 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채식주의자가 될 것”

 

산울림의 김창완은 몇 년 전 채식주의자의 길을 걸은 적이 있다. 한 드라마 촬영장에서 뙤약볕에 양철 지붕을 쳐다보고 불쌍하게 누워있는 돼지의 운명을 보고 고기를 단번에 끊은 것이다. 그때 그의 채식 온도는 락토(Lacto, 우유 등 유제품은 먹지만 달걀 섭취는 하지 않는 단계) 쯤에 있었다. 평소 즐겨 먹던 음식을 두고 한 번의 고민 없이 그렇게 격변의 과정을 거칠 수 있을까.


이 같은 의문이 실감으로 다가온 건 오는 5월 2일 오후 8시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첫 내한무대에 오르는 '살아있는 전설'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의 꾸준한 캠페인 덕분이다. 채식주의자인 그는 한 캠페인에서 “도살장 벽이 유리로 돼 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다”(If slaughterhouses had glass walls, everyone would be vegetarian)라고 단언했다. 그의 캠페인이 허언(虛言)으로 읽히지 않는 건 이 캠페인 영상을 시청한 후 갖게 되는 잔영 속 죄책감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폴 매카트니 공식 사이트

 

 

폴 매카트니는 적극적인 채식 권유 운동가다. 지난 2009년 유엔기후변화회의(UNFCCC) 본회의에 앞선 열린 토론회에 그가 나타나 일주일에 하루만큼은 채식을 하자는 '고기 없는 월요일(Meat Free Monday)'를 제안했다. 하루 채식만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25분의 1로 줄여 지구 환경을 보호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내친김에 같은 제목의 노래도 발표했다. '고기 없는 월요일 재미있는 날이죠/미래를 생각해봐요/지구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봐요~'('Meat Free Monday' 중에서) 단백질 섭취에 대한 고민도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과거에 우리는 채식만으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지 걱정했어요. 간호사였던 우리 엄마도 육류 섭취만이 단백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예전에는 다들 그렇게 생각했죠. 지금은 방법이 정말 많아요.”



출처: Meat Free Monday 공식 유튜브

 

 

모피산업 ‘비판’, 정치 지도자 ‘일갈’…채식의 사회운동가

 

매카트니는 1969년 사진작가 린다 이스트먼과 결혼한 이후 아내의 영향을 받아 채식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경은 불분명하다. 양고기를 먹는 와중에 초원을 뛰어다니는 양들을 보고 채식을 결심했다는 얘기도 있고, 낚시 바늘에 걸려 물고기가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고 애처로움에 육식을 접었다는 설명도 있다.

매카트니를 포함한 그의 가족은 모두 유명한 동물 운동가이면서 채식주의자다. 특히 그의 딸 스텔라 매카트니는 모피와 가죽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출처: 폴 매카트니 공식 사이트

 

 

가족 안에서 결속된 동물 보호와 채식에 대한 그의 애정은 점점 사회적인 운동으로 번지면서 세계인의 귀를 더 확장시키는 촉매 역할로 다가섰다. 동물의 권리를 위해 모피로 사용되는 바다표범 사냥과 세계 최대인 중국 모피산업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1998년 유방암으로 사망한 린다를 위해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암 치료제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지난 2008년 매카트니는 한 영국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육식하는 티벳 지도자 달라이 라마에게 “육식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밴드 트래비스의 보컬 프랜시스 힐리는 지난 2010년 자신의 솔로 음반 작업에 참여해준 매카트니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가족 전체가 채식주의로 전환했다고 알렸다. 하지만 생선의 유혹에 못 이겨 채식을 포기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사실이 알려지면 폴에게 혼날지도 모른다”며 “폴에겐 비밀로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남겨 화제가 됐다.


 

수 백명의 공연 스태프도 모두 '채식'

 

출처: PETA 공식 사이트

 

 

영화 감독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매카트니에게 세 시간 동안 공연을 이어가는 건강의 비결을 물었다. 매카트니는 ‘명상’과 ‘채식’의 힘이라고 했다. 그에게 채식은 어제와 같은 에너지를 오늘 계속 공급받는 힘의 원천인 셈이다.


매카트니의 채식 단계는 가장 낮은 등급인 비건(Vegan)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매카트니와 함께 공연 투어를 다니는 스태프는 ‘그의 제안(?)’에 따라 채식단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공연 투어에서 빠질 수 있다. 몇 년 전 한 아티스트의 내한공연 때, 스태프 중 일원이 햄버거를 몰래 먹다 걸려 중도 하차한 일화는 유명하다.



출처: Meat Free Monday 공식 사이트

 

 

'PAUL McCARTNEY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은 비틀스 시절부터 개인 솔로 활동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2013년부터 시작된 23개 도시 투어 '아웃 데어'(Out There)의 일환으로 열리는 이번 무대는 새 음반 '뉴'(New)의 수록곡부터 비틀스 시절의 히트곡을 망라할 예정이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채식에 대한 그의 열정을 생각한다면, 'Meat Free Monday'가 어느 순간 울려 퍼져 5만 관객의 인식을 새롭게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뮤지션 이상의 그 '무엇'으로 지금 평가받고 있다.




 

 Writer. 김고금평
머니투데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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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대의 우상 폴 매카트니, 그리고 그의 음악을 사랑해 마지않는 팬들이 여기 있습니다. 한국 대학 최초로 <비틀즈 강좌>를 개설한 그룹 사운드 ‘다섯손가락’ 출신의 이두헌 교수, 레코드 수집가이자 LP바 뮤즈온의 주인인 김원식 대표, 비틀즈 앨범 수집가이자 영국에서 활동하는 통역가 리처드 씨, 런던에서의 피아노 연주 버스킹으로 화제가 된 손지훈 학생까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팬들이 만나 폴 매카트니를 이야기했습니다.



질문

먼저 간단히 자신의 소개 부탁 드립니다. 

이두헌 네, 저는 현재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음악학과 겸임교수로 비틀즈를 강의하고 있는 이두헌입니다. 1980년대에는 그룹 사운드 ‘다섯손가락’의 리더이자 리드보컬로 활동했지요.

김원식 여기서 나이는 제가 제일 많은 것 같군요. 그래도 폴 매카트니보단 어립니다, 하하. 이곳 뮤즈온의 주인인 김원식입니다. 필레코드라는 레코드숍 또한 운영 중입니다.

리처드 저는 리처드라고 합니다. 프리랜서 통번역사 일을 하고 있고요. 올해엔 폴을 직접 만나길 기대 중입니다.

손지훈 저는 성균관대학교 통계학과에 재학 중인 비틀즈를 사랑하는 평범한 학생 손지훈이라고 합니다.


질문

손지훈 군은 평범한 학생이라고 하기엔 조금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죠. 폴 매카트니의 공식 트위터에 등장해 한 동안 화제였어요.

손지훈 아,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에요. 런던 킹스크로스역에 가면 누구든지 칠 수 있는 피아노가 한 대 있거든요. 거기 앉아서 ‘Let It Be' 'Yesterday' 등의 곡을 연주했는데 그 때 누군가 찍은 사진을 폴 매카트니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거예요! 제 인생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를 실천했을 뿐인데 이렇게 이슈가 될 줄은 몰랐어요. 폴 매카트니가 태어난 곳에서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게 평생의 꿈이었거든요. 애비로드에서 사진도 찍고요.

출처: 폴 매카트니 공식 트위터



질문

김원식 대표님은 영국 전역을 돌며 비틀즈의 음반을 수집하셨죠.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김원식 십 년 전 비틀즈의 자취를 따라 영국을 여행했던 기억이 나네요. 영국에 가면 대개 차를 렌트하곤 합니다. 그게 움직이기가 편하니까요. 한 번은 콜렉터의 욕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순수하게 비틀즈의 흔적을 쫓아 여행한 적이 있어요. 런던에서 리버풀까지 차를 몰며 쉴 새 없이 내달렸습니다. 그들의 추억이 깃든 레코드숍이며 카페, 클럽 등등... 오직 비틀즈를 음미하며 도시 곳곳을 탐험하는 거지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멋진 여정으로 남아 있어요. 1990년대부터 영국에 드나들기 시작해서 남들은 보기 힘든 앨범도 많이 구했습니다. 비틀즈와 폴 매카트니의 음반만 어림잡아 400장이 넘을 거예요. 수집 목록 중에는 정식 발매되지 않은 해적판들도 꽤 됩니다.


질문

리처드 씨는 영국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비틀즈의 음악을 접했다고 들었어요.

리처드 나이로 따지면 비틀즈 팬 1세대라고 할 순 없겠지만 비틀즈와 폴 매카트니에 관한 한 누구보다 절대 뒤지지 않는다 자부합니다. 어머니가 음악에 조예가 깊으셔서 어릴 적부터 음반에 둘러싸여 지냈는데 음악은 늘 제 친구이자 가족이었어요. 턴테이블이 저보다 키가 클 정도로 꼬마 아이였을 때 제일 처음 듣게 됐던 노래가 'Yesterday'였죠. 참 신기한 우연 아닌가요? 내 돈 주고 처음 산 음반도 <Abbey Road>예요. 그 때의 운명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봐야겠죠.


질문

이두헌 교수님은 19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 ‘다섯손가락’의 리더셨어요. 아티스트로서 또 팬으로서 비틀즈는 어떤 의미였나요?

이두헌 밴드 데뷔부터 해체까지 죽 활동을 하며 느꼈던 건 우리 또한 비틀즈와 유사점이 있다는 거예요. 물론 캐릭터는 다르지만 멤버 중 누구는 존 레논 같고 누구는 폴 매카트니 같고, 비하인드 스토리도 비슷한 점이 있고요(웃음). 밴드라면 그들의 길을 비슷하게 따라갈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했죠. 음, 제가 1983년에 데뷔했는데 우리 팀을 데뷔시켰던 팝 칼럼니스트 강인중 선생이란 분이 비틀즈의 대단한 마니아였어요. 하지만 우리도 당시엔 혈기왕성할 때라 처음엔 테크니컬하고 화려한 기술을 보여주는 팀들에 눈길이 더 가더군요. 그러다 어느 날 강한 인상을 받았던 계기가 있었는데 'All My Loving'이란 곡 아세요? 조지 해리슨의 기타 솔로 부분이 있는데 저도 기타를 치지만 그대로 재현해내기가 참 힘들어요. 그 때부터 ‘어라?’하고 파고 들기 시작하니 가사의 깊이가 보이고 점점 더 여러 가지 측면을 심도 있게 연구하게 됐습니다. 후에 버클리 음대에서 공부할 땐 이론적인 부분에 더 중점을 뒀고요.




질문

그러한 점들이 비틀즈를 가르치게 된 계기가 되셨겠죠? 국내 최초로 대학에서 ‘비틀즈’ 강좌를 개설하셨어요.

이두헌 제아무리 레전드라 해도 각자의 기준에 따라 평이 갈리는 팀들이 많은데 비틀즈는 누가 보아도 이견이 없는 ‘넘버 원’입니다. 전 세계 최고의 음반 판매량, 무수한 히트곡들, 수상 경력 등을 차치하고라도 작곡, 편곡, 화성, 녹음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두 번째가 될 수 없는 밴드예요. 강의를 개설하고 처음엔 요즘 학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반응이 폭발적이더군요. 역시 비틀즈는 시대를 초월하는 팀이 틀림없구나 싶었죠.




질문

비틀즈의 멤버 중에서도 폴 매카트니, 그리고 그의 음악을 좋아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리처드 폴 매카트니는 단언컨대 음악의 ‘종합선물세트’입니다. 폴의 디스코그래피를 뒤져보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음악의 장르가 다 있어요. 록, 재즈, 컨트리, 클래식, 거기에 파이어맨(The Fireman)이라는 이름으로 낸 일렉트로닉 앨범까지. 그는 비교불가예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대중음악가'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기도 하지만 솔로, 듀오, 트리오, 콰르텟, 퀸텟 심지어 자선 밴드 모임으로까지 1위를 차지한 전무후무한 아티스트죠.

손지훈 폴 매카트니는 역사상 최고 수준의 멜로디 메이커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알고 보면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실험적인 측면도 굉장히 강하거든요. 그 두 가지를 훌륭히 겸비한 뮤지션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어요. 

김원식 비틀즈는 영국 록이 대중과 친해질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폴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봐요. 먼저 요절한 존 레논을 비틀즈의 대표적 인물로 꼽는 이들이 있는데 모르는 소리예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비틀즈의 대표곡 ‘Yesterday’, 이 노래도 폴 매카트니가 만든 노래잖아요. 저에게 있어 폴은 반려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레코드를 수집할 때마다 늘 염두에 두고 찾게 되는 이름이지요.

이두헌 존 레논이 폴 매카트니에게 함께 하자면서 했던 얘기가 ‘우리 팀을 더 강하게 만들어 달라’였습니다. 그 때 폴이 합류하지 않았다면 비틀즈가 지금처럼 강해졌을까요? 폴 매카트니가 있었기에 비틀즈가 존재했습니다. 폴이 없으면 비틀즈라는 그룹에 함몰이 생길 정도로 그의 재능은 대단했어요. 그의 노래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를 가졌는지 그래프로도 구현할 수 있을 정도거든요. 음악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빠르고 신나는 곡을 하다가 조용한 발라드를 할 때가 있잖아요? 신기한 건 폴 매카트니의 발라드는 분위기를 절대 다운시키지 않아요. 쉬어가거나 구색을 맞추기 위한 곡이 아니란 거죠.


질문

그렇다면 비틀즈 내에서 폴 매카트니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이두헌 수업에서도 많이 하는 얘긴데 비틀즈를 얘기하자면 저는 두 가지를 빼놓을 수 없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그룹 지니어스(Group Genius)’.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니라 천재 혹은 보통 사람인 네 명이 그룹을 결성해 비로소 천재가 된 게 아닌가 싶고요. 두 번째는 ‘프레너미(Frienemy)’. 이게 포인트인데 그들은 친구이자 경쟁관계에 있었어요. 폴 매카트니가 엄청난 곡들을 써 오니까 그런 자극이 채찍이 돼서 존 레논도 'Come Together' 같은 곡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거죠.

리처드 존 레논은 자신의 인생 파트너로 폴 매카트니와 오노 요코 두 사람을 꼽았어요. 이게 팀이 해체되고 난 다음에 한 발언이니까 그에게 폴 매카트니가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짐작이 가죠? 존은 폴의 멜로디 메이킹 능력에, 폴은 존의 시적인 가사에 서로 자극받았단 얘기가 있어요.




질문

마지막으로 이번 폴 매카트니의 내한공연에서 어떤 점이 가장 기대되세요?

김원식 폴 매카트니의 앨범 중에서는 <Ram>을, 그 중에서도 ‘Monkberry Moon Delight’라는 곡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 시절 린다 매카트니와의 로맨스가 참 보기 좋았어요.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오래 가길 응원했던 커플입니다. 세월이 빠르기도 하죠. 그도 어느덧 만 72세예요. 저보다 나이가 많은데 아직도 왕성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이두헌 저는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오케스트라 사운드 없이 밴드 날것의 노래로 듣고 싶어요. 이건 폴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잖아요. 한 가지 소원이 더 있다면 그가 'PS. I Love You'를 부르는 겁니다. 꽤 오랫동안 공연 레퍼토리에 없었거든요.

리처드 사실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에요. 제가 가장 기대하는 것은 폴과 한국 팬들과의 교감. 국내 최대 비틀즈 팬클럽 ‘페퍼랜드’에서 신청곡을 투표하고 있는데 이 리스트가 꼭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듣고 싶은 노래는 무척 많은데 한국 팬들이 알 법한 곡 중에서 이제껏 한 번도 라이브하지 않았던 'No More Lonely Night'이란 노래가 있어요. 만에 하나 폴이 이 노래를 부른다면 아마 잊지 못할 기록이 되겠죠.

손지훈 제가 듣고 싶은 곡은 한 곡이 아니라 세 곡인데요. 보통 폴 매카트니가 앵콜 마지막에 연달아 부르는 메들리예요. 'Golden Slumbers' 'Carry That Weight' 'The End' 순으로 이어지는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인 <Abbey Road>의 수록곡들이죠. 특히 'The End'의 가사는 철학적이면서도 시적이에요. 제가 아는 모든 노래 중에 제일 잘 쓴 가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국 관객들의 열정적인 에너지를 폴이 꼭 느끼고 갔으면 좋겠어요. 한국 팬들은 어느 나라보다 그에게 뜨거운 환호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이두헌_ “폴 매카트니가 있었기에 지금의 비틀즈가 있습니다”
폴 매카트니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비틀즈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친구이자 경쟁관계에 있었어요. 하지만 폴로 인해 비로소 ‘그룹 지니어스(Group Genius)’의 완전체가 되었죠.

김원식_ “폴 매카트니는 제 레코드 라이프의 동반자입니다”
67년을 살면서 수많은 레코드들을 수집했지만 비틀즈와 폴은 제 곁을 지키는 반려자와도 같았습니다. 소중히 간직해두었던 폴 매카트니의 콜렉션들을 다시 꺼내볼 시간이 된 것 같군요.

리처드_ “폴 매카트니는 세대나 나이를 초월합니다”
폴 매카트니보다 훨씬 젊은 사람들도 그의 노래를 찾아 듣습니다. 그에게는 복잡한 배경지식 없이도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만드는 세대를 초월하는 강한 흡인력이 있어요.

손지훈_ “폴 매카트니에 관한 모든 것이 제 인생의 버킷리스트였어요”
제 인생의 버킷 리스트는 전부 폴 매카트니와 연관된 것들이에요. 런던과 리버풀에서 길거리 버스킹 하기, 사인을 받고 함께 사진 찍기, 곧 실천하게 될 라이브 공연 가기까지! 




 

장소 협조. 뮤즈온

앨범 소장. 리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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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티스토리 운영자 2015.03.13 10:11 신고

    안녕하세요, TISTORY입니다. 이 게시글의 이미지가 3월 13일자 티스토리 앱 카테고리 배경이미지로 소개되었습니다. 항상 좋은 글과 사진으로 활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틀즈가 활동했을 때와 해체 후인 1970년대에 비틀즈하면 바로 연상되는 인물은 폴 매카트니였다. 먼저 그는 대중적 인기 측면에서 사상 최고의 아티스트 비틀즈 중에서 최고였고, 다른 어떤 동시대 가수보다도 한참 위였다. 1970년대에 ‘윙스(Wings)’라는 이름의 밴드를 이끌던 시절,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인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차트 1위곡을 거두었다. 그의 빌보드 차트 넘버원 송은 무려 32곡으로 역사상 최다 기록이다. 많은 음악관계자들은 이 기록은 결코 깨지지 않을 ‘콘크리트’ 기록이라고 말한다.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



실력과 재능으로도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그에게 가장 자주 붙는 수식은 ‘가장 성공한(the most successful)’이란 표현이다. 그는 비틀즈 때도 대단했지만 해산 이후 윙스를 포함한 솔로 시절에도 엄청났다. 빌보드 1위곡만 아홉 곡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틀어 그의 인기 철옹성에 높이를 맞춘 인물은 엘튼 존과 마이클 잭슨 밖에 없었다.
 
‘가장 성공한’이란 타이틀이 전부가 아니다. ‘가장 위대한(the greatest)’이란 수식도 그의 것이다. 그는 실력과 재능 측면에서도 언제나 톱이었다. 멜로디뿐 아니라 화성과 리듬에도 능통했기에 음악종사자들은 폴 매카트니를 천재로 명명한다. 서구 팝 음악계에서 천재로 불린 인물은 그 외에 브라이언 윌슨, 프랭크 자파, 데이비드 보위 등에 불과하다.


솔직히 파퓰러의 명곡 중 명곡으로 통하는 <Yesterday>, <Hey Jude>, <Let it be>를 써낸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위대하다. 솔로 활동을 통해서도 그는 <Live and let die>, <Silly love songs>, <Band on the run> 그리고 스티비 원더와 호흡을 맞춘 <Ebony and ivory> 등 불후 불멸의 곡을 발표했다. 그가 보여준 경이로운 음악성은 실로 딴 음악가나 대중들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우리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윙스가 1977년에 발표한 곡 <Mull of kintyre>는 영국 차트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곡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가장 성공한 그리고 가장 위대한’ 작곡가 겸 가수다. 그는 자신의 고국인 영국을 적어도 음악에서만큼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고, 영국 왕실과 정부는 1997년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를 ‘Sir Paul McCartney’ 즉 폴 매카트니 경(卿)으로 불러야 한다. 따라서 팝 역사에서 비틀즈도, 폴 매카트니도 위대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비틀즈로도 또 개인으로도 역사상 넘버원인 셈이다.



영국의 자랑 - 폴 매카트니 경

비틀즈가 해체한 후 그는 멤버들 가운데 유일하게 밴드 윙스를 결성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관객들에게 밴드 비틀즈에 대한 추억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1970년에 해산한 순간부터 ‘역사’가 되어 있던 비틀즈를 그리워했다. 재결합설이 끈질기게 돌아다녔다. 폴 매카트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밴드 윙스를 꾸려 스스로 비틀즈를 대신하려고 했다. 그래서 비틀즈 이후 폴의 노래는 멤버들 중 누구보다도 로큰롤 성향이 강했다. ‘나라도 비틀즈에 대한 향수를 전하련다!’는 마음이었다고 할까. 밴드로 달린다는 뜻의 ‘Band on the run’이 증명해준다. 그가 윙스 시절 열심히 순회공연을 다니던 1975-1976년은 발표하는 곡마다 당연지사처럼 빌보드차트 상위권을 점령하고 가는 곳마다 관객을 인산인해로 몰고 다닐 때였다. 과거 비틀즈에 못지않은 뜨거운 공연 열기였다. 당시 시사주간지 ‘타임’은 ‘비틀의 컴백’이라는 제목으로 폴 매카트니를 커버스토리를 다뤘다. 폴이 곧 비틀즈라는 내용으로, 폴에게 비틀즈의 대표성을 부여한 것이다.



인류애로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다 

그는 또한 인류애의 소유자였다. 전성기 때 흑인 최고 아티스트인 스티비 원더와 마이클 잭슨과 만나 각각 <Ebony and ivory>(1982년)과 <Say say say>(1983년)를 발표했다. 전자는 갈등으로 얼룩진 흑백의 화합을 갈망한 그의 인류애를 말해주는 곡이다. 위 두 곡은 모두 빌보드 차트 정상을 밟았다. 영국차트 1위에 오른 곡 <Pipes of peace>가 그렇듯 폴 매카트니도 파트너 존 레논처럼 언제나 음악으로 사랑과 평화를 지향했다. 그는 젊었던 시절부터 줄곧 매력적인 사람(Charm)으로 통했다. 언론이 매력이란 어휘를 동원한 것은 그가 예쁜 외모는 물론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하나의 브랜드가 된 폴의 라이브 콘서트는 뜨거운 로큰롤 호흡과 열정의 도가니다. 


전성기 시절이나 지금이나 공연장은 열기로 가득하고 흥분한 관객들은 자연스레 그의 나이를 잊어버린다. 그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무대에 한 가수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역사’가 움직이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PAUL McCARTNEY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에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가올 5월 2일은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 중 최고의 날로 기억될 것이다. 


특유의 미성과 조금은 탁한 로큰롤 보이스를 혼용하는 음색의 변화를 통해 무대에 다채로움을 구현하는 폴 매카트니. 그의 공연 레퍼토리는 솔로 시절의 곡들이 위주지만 살짝살짝 비틀즈 레퍼토리를 끼워 넣는다. 어떤 곡이든 관객들은 향수와 감동에 젖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참으로 대중적이고 관객서비스에 충실한 인물. 대중과 교감하는 아티스트의 진정성이 폴 매카트니에게 있다. 그는 대중을 사랑하고 대중은 그를 사랑한다.  

 



 

Writer. 임진모
음악평론가 

가수를 말하다』, 팝 경제를 노래하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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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티스토리 운영자 2015.02.06 11:22 신고

    안녕하세요, TISTORY입니다. 이 게시글의 이미지가 2월 6일자 티스토리 앱 카테고리 배경이미지로 소개되었습니다. 항상 좋은 글과 사진으로 활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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